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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흔들립니다!

[소년희망편지] 아픈 기억들과 헤어지고 싶습니다!




1.



바람이 휘몰던 어느 날 밤 그 어느 날 밤에

떨어진 꽃잎처럼 나는 태어났다네

내 눈에 보이던 아름다운 세상 잊을 수가 없어

가엾은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이탈리아 번안곡 '1943년 3월 4일생' 가사 도입부)


어머니는 나를 낳지 않으려고 금계랍(학질약, 유산제로 사용) 수십 알을 먹었건만 나는 모질게도 태어났습니다.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노점상 아버지와 폐결핵 환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영등포 피난민촌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나는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씨가 부른 ‘1943년 3월 4일생’이란 제목의 노래를 간혹 부르며 내 출생의 간난(艱難)을 생각하곤 합니다.


극빈과 가정불화에 못 견딘 어머니는 3형제를 두고 가출했습니다. 부산의 여인숙에서 종업원 생활하며 돈을 모은 어머니는 여수공단에서 음식과 술을 팔았습니다. 팔도에서 몰려든 사내들을 상대로 돈을 번 뒤에는 여수의 대표적 홍등가인 ‘휘파리 골목’에서 술집을 운영했습니다, 그리고는 소년원을 갔다 온 연년생 형을 기술학원에 보냈으나 형은 기술은 배우지 않고 건달패들과 어울려 죄를 짓다 교도소를 드나드는 ‘법자’(법무부의 자식들이란 은어)가 됐습니다.


고교 시절에 나는 교내 패싸움에 휘말렸는데, 이에 대해 학교는 우리 패거리에게 퇴학을 결정했으나 우리 부모들에게 금품과 향응 접대를 받고 무기정학으로 바꿔주었습니다. 시골 공고를 가까스로 졸업한 나는 서울의 한 공장에서 납땜 일을 하다 코피를 쏟거나 술에 취해 휘청거렸습니다. 나에게 좌석을 내주지 않는 세상, 청춘이 가련했던 나는 ‘입석’(立席)의 세상을 떠나기 위해 해인사로 향했습니다. 시립병원에서 행려병자로 돌아가신 배천 조씨(白川 趙氏)의 극락왕생을 빌고 싶었던 걸까요. 새벽 3시, 가야산 해인사 새벽을 깨우던 법고(法鼓) 소리에 두 손 모으며 세속의 방황을 끝내고 싶었으나 욕정을 견디지 못한 나는 짧은 행자 생활을 그만두고 하산했습니다.


입석의 삶이 싫어 입산했으면 세상 미련을 버리든가, 욕정을 따라 하산했으면 세속에 물들어 살았어야 했는데 나는 파산의 아비가 되고 말았습니다. 달아난 전처가 떠넘긴 큰 빚으로 인해 전셋집마저 날린 뒤 주소 불명의 아비로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사채업자들은 불법 거주 중인 영구임대 아파트에까지 쫓아왔습니다. 아내였던 여자에게 버림받은 뒤, 사채업자 추심과 명도소송에 시달리던 나는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은 생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두 아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가슴이 찢기는 고통으로 피눈물 흘리며 밤을 지새우다 찾아간 새벽 교회, 울며불며 눈물 콧물 쏟으며 살려달라고, 나는 괜찮으나 내 새끼들은 제발 좀 살려달라고 애원하다 만난 아버지 하나님!



2.



사망한 뒤 414일 동안 냉동고에 갇혀있던 중국동포 한씨 할아버지를 벽제승화원에서 태워드리고, 코리안드림에 실패한 뒤 중풍병자가 된 중국동포 정씨와 알코올 중독으로 술주정뱅이로 살다 위암에 걸린 중국동포 김씨 등이 연길로 돌아가 죽고 싶다고 해서 귀환 비행기로 고향에 보내드린 것은 행려병자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불효를 조금이나마 갚고 싶어서였습니다.


훔치고, 빼앗고, 때리다 소년원에 가거나 소년재판을 받는 어린 법자들과 부모이혼과 가정해체로 거리를 떠돌고, 자살과 자해를 시도하는 아이들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그 아픔을 겪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내 아이들도 그들처럼 어둠의 자식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그 아픈 눈물을 외면할 수 없어서 이 길에 뛰어들었지만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그만 떠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아픈 기억들을 그만 지우고 싶습니다. 그 공간에 행복한 기억들을 채우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몸속에 잠복해 있는 바이러스처럼 기억의 창고에 쌓여 있는 아픈 기억들이 종영되지 않은 영화처럼 흑백 필름을 돌립니다. 위기 청소년의 아픔을 듣다 보면 기억의 창고에 켜켜이 쌓인 내 아픔이 일어나 비명 지릅니다. 손주를 둔 할아버지가 됐으면 초연해질 때도 됐건만 아직도 아프고 힘듭니다. 아픔의 칼날은 녹슬지도 않는지 아픈 영혼에 생채기를 냅니다.


이 아픔과 헤어지려면 아픈 가족들과 연을 끊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칼날 위를 걷던 인생에서 나는 탈출했으나 나의 부모 형제는 여전히 위태롭습니다. 그러므로 늙고 병든 홀어미와 알코올 중독자가 된 연년생 형과 교통사고로 10년 넘게 누워 있는 전신 마비 동생을 배웅하며 핏줄의 의무를 다할 때 나는 비로소 나를 괴롭히는 아픈 기억들과 헤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리를 마련해주셨습니다. 9할이 천사인 아내 최 권사를 통해 깨진 가정을 회복시켜 주시면서 큰아들을 공학박사로, 작은아들을 소년희망공장 공장장으로 만들어주신 하나님이 ‘너처럼 버려지고 상한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라!’면서 위기 청소년 사역이라는 좌석을 내어주셨습니다.


이 좌석은 편한 좌석이 아닙니다. 배고픈 아이들에게 밥을 주고,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버려진 아픔으로 우는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대한민국에서 왕따와 차별, 두려움에 떠는 중도입국 이주 청소년들에게 한국에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어야 하는 귀하고 무거운 좌석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속이고, 빼앗고, 훔치고, 때리며 사는 위기 청소년들에게 속아주어야 하고, 찔려주어야 하고, 당해주어야 하는 좌석입니다. 10년 넘게 앉아 있는 가시방석인 이 좌석에서 나는 종종 흔들립니다. ‘하나님, 이젠 그만두고 싶어요. 너무 힘들어요.’ 하나님이 주신 과업을 잘 감당해야 아팠던 인생과 잘 헤어져서 아버지 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는 일엽편주(一葉片舟)이니 어쩌면 좋습니까.


※ 이 글은 기독교 잡지 <빛과소금> 1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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