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경호원 출신 형님께!
- 소년희망배달부
- 10월 17일
- 5분 분량
[지리산으로 부친 가을 편지]

▲세속을 떠나 떠돌이 생활하던 1999년에 발표한 음반 <아! 해남> 표지
여보게 어디까지 가나, 여보게 어디로 가나
무엇을 찾으려 가는가, 무엇을 얻으려 가는가
여보게 무얼 생각하나, 여보게 무얼 원하나
무엇을 이루려 하는가, 무엇을 남기려 하는가
(한치영 작사·곡 ‘여보게 행복이 어디에 있던가’ 가사 일부)
형님 노래를 들으면서 출근했습니다. 차창을 열고 성산대교를 건너는데 한강에서 부는 가을바람이 처음엔 선선했다가 차츰 찬바람으로 변하여서 창문을 닫았습니다. 이제, 시월이 가면 겨울이 오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형님과 형수님이 주신 따스한 정이 그리워졌습니다.
저는 잊지 못합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혼으로 가정이 해체된 가운데 상경해야만 하는 부득이한 상황에서 초등학교 졸업생이던 둘째 아들을 지리산 실상사 작은학교로 보내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실상사 근처에 사시던 형님과 형수님이 둘째 아들을 돌봐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차마 어린 아들을 지리산에 두고 갈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파산 상태여서 두 아들과 살 방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보증금을 회사에서 대출받아서 월세 단칸방을 얻었습니다. 참으로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형수님께서 300만 원이란 큰돈을 보내주시면서 힘을 내라고 위로해주셨습니다. 그 돈은 그냥 돈이 아니라 삶의 용기를 주신 힘이었습니다. 살자, 살아서 좋은 날 보자고 다짐하고 다짐하면서 ‘삶’이란 제목의 짧은 시를 썼습니다.
나는 살아야 했다
어린 자식과 함께

하늘의 선물인 천사 같은 아내가
아니었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두 아들의 인생은 또한 어떻게 됐을까?
위기청소년 돕는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아내가 없었다면 저는 죽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결핍과 상처로 인해 강퍅진 나를 불쌍히 여기며 감싸준 아내가 아니었다면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아픔으로 인해 무너졌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됐다면 두 아들의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픕니다. 그렇게 됐다면 어려운 아이들을 돕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인생이 무너졌는데 위기청소년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감사하게도 저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이 아내를 돕는 배필로 보내주셔서 제가 살았고, 두 아들이 살았고, 위기청소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어젯밤, 아내 발과 종아리를 주물렀습니다. 운동할 틈 없이 일하는 아내는 다리가 아파서 쉽게 잠들지 못합니다. 근육이 빠져나가고 혈액 순환이 원활하지 않은 탓입니다. 생명의 은인인 아내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아내가 편히 잠들 수 있도록 거친 발과 손을 마사지해주는 정도입니다. 아내는 저의 작은 수고에 고맙다고 하지만 생명을 구해준 은공을 갚기에는 작은 수고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죽는 날까지 아내의 은공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느덧, 재혼한 지 19년이 넘었습니다. 2006년 8월 19일 결혼식에서 불러주신 축가를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형님께서는 저의 졸시 ‘가난한 청혼’을 곡으로 만들어 축가로 불러주셨습니다. 아내는 시에 속아 넘어갔다고 푸념할 때가 아주 간혹 있지만 사실은 저의 시를 좋아합니다. 제가 시인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거나 시 쓰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지만 천사 같은 아내를 얻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가난한 청혼’을 쓴 건 잘한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재혼 20주년인 내년엔 아내와 함께 국내 여행을 갈 계획입니다. 올여름, 울산과학기술원(UNIST) 연구교수로 재직 중인 큰아들이 엄마 아빠의 결혼 기념을 위해 베트남 여행을 보내주었는데 공황장애 등의 건강 문제가 발생하면서 저는 체질상 국내 여행용이란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내년 결혼 20주년엔 해외여행이 아닌 국내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때, 형님을 뵈러 가고 싶습니다. 지리산 맑은 바람을 쐬면서 형님의 인생 깊은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지리산 실상사 인근 마을 아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쳐주는 한치영 형님.
위기청소년 돕는 일을 한 지가 어느덧, 10년이 넘었습니다. 제가 잘 나거나 훌륭해서 이런 일을 한 게 아니란 걸 형님은 잘 아실 것입니다. 상처로 얼룩진 아이들, 버려져 우는 아이들이 짠해서 일을 벌였습니다. 그 아이들의 아픔을 보면 저도 모르게 버림받은 어린 시절의 아픔이 되살아났습니다. 그 울컥거림을 참을 수가 없어서 일을 벌였습니다. 저 혼자 했다면 참패당했을 것입니다. 위기청소년을 살리기는커녕 선무당 굿판처럼 저 혼자 길길이 날뛰다가 제풀에 지쳐 고꾸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를 잘 아시는 하나님이 일은 벌이게 한 뒤에 저를 낮은 자리에 재배치하신 뒤에 평생을 비영리 공익 활동에 바친 아내로 하여금 상한 아이들을 살릴 뿐만이 아니라 이 일에 나선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소년원 출원생과 어린 미혼모!
학교 밖 청소년을 비롯한 위기청소년!
그리고, 한국에 중도 입국한 이주 청소년들!
우는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습니다. 배고픈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었습니다. 버림받은 아이들을 안아주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것은 단순한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아이들의 눈물 좀 닦아주는 것, 밥을 주는 것, 안아주는 것만으론 어림없었습니다. 부모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의 상처는 그런 방법만으론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한 생명을 낳기 위해 고통을 감내한 엄마, 그 자식을 키우기 위해 수많은 어려움을 견뎌낸 엄마가 아니면 굶주린 들짐승처럼 사납고 거친 아이들을 살리기는커녕 상대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위기청소년 살리는 일에 매우 부적절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 사역에 핵심은 사랑과 재정입니다. 때론, 사랑보다 더 필요한 것은 재정 즉 ‘돈’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체로 돈을 잘 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욱하고 그래서 분노하고 그래서 신세 한탄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가난뱅이였던 제가 딱 그렇습니다. 저는 10년 넘게 일하면서 자금 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가난뱅이에다 무능한 저에게 왜 이런 무거운 역할을 맡기셨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때는 우쭐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위기청소년 사역의 원동력이 되어준 스토리펀딩을 통해 3억 원이란 큰돈이 모이는 걸 보면서 제 글빨 덕분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었습니다. 한두 해도 아니고 자금만치 10년 넘는 세월 동안 위기청소년을 굶긴 적도 없고, 직원 월급 밀린 적도 없고, 월세 체납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적도 없었던 것은 저의 능력이 아니라 하늘의 도우심이고 형님처럼 아무런 조건도 없이,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도와주신 분들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한치영 형님 가족이 사는 지리산 숲속의 황토 흙집.

▲한치영 형님 해우소에 새겨진 글귀. 똥 오줌을 한울로 모시는 곳입니다.
농부는 가을이 되면 추수하는데 저희는 내년에 사용할 희망 자금을 모아야 합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한 것처럼 수많은 위기청소년을 살리려면 인력과 예산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연례행사처럼 도움을 청했는데 이를 진행할 때마다 힘듦과 괴로움을 토했는데 이제는 그 짐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제 능력으로 자금을 구했다면 또다시 능력을 발휘할 생각에 힘들고 괴롭겠지만 그게 아니란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 짐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올해는 어려움을 겪는 이주 청소년에게 희망을 선물해달라는 제목으로 ‘사랑의 열매’와 함께 사회공헌 플랫폼 '카카오같이가치'에서 ‘희망 자금’ 모금 캠페인을 하고 있는데 모금 종료 일이(11월 11일) 한 달도 남지 않은 오늘(10월 15일) 현재 목표금액(18,360,000원)의 22%인 4,038,200원 달성에 그쳤습니다.
4,000,000원
추석을 앞둔 지난 9월 30일 형님이 큰돈을 보내주셨습니다. 작년(2024년)과 재작년(2023년) 그리고, 재재작년(2022년)에 이어서 큰돈을 또 보내주셨습니다. 기초연금을 모아서 보냈다고 하셨습니다. 지리산자락에서 살기에 돈 쓸데가 별로 없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돈의 횡포에 인간의 도리가 무너진 살벌한 세상을 안타까워하면서 돈이 지배하는 세상을 탈출한 형님 가족은 기초수급자보다 더 가난한 청빈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알뜰살뜰 모은 후원금을 희망 자금으로 보내주셨습니다.

▲한치영 형님과 외아들 태주군이 기타와 오카리나로 연주하는 모습.
가지면 가질수록 초라한 삶의 모습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는 삶의 향기
여보게 어디까지 갔나, 여보게 무얼 보았나
어디에 행복이 있던가, 어디에 사랑이 있던가
(한치영 작사·곡 ‘여보게 행복이 어디에 있던가’ 가사 일부)
더 많이,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뺏고, 짓밟으면서 아귀다툼을 벌이는 욕망의 전쟁터를 향해 가지면 가질수록 삶은 초라해진다고 노래하신 형님, 나누면 나눌수록 삶의 향기는 커진다는 형님의 노래를 듣고 또 듣습니다. 욕망과 무한경쟁의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자도생의 무정한 삶을 선택한 도시에서 저 또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돈의 노예가 아닌 영혼의 자유를 선택한 형님이 그립습니다. 가난이 아닌 청빈, 욕망이 아닌 평화로운 삶을 사시는 형님과 형수님 그리고, 오카리나로 자연을 노래하는 한태주군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참, 제18회 세계인의 날이자 제24회 부천 다문화축제일인 지난 9월 14일 아내가 부천시의회 의장상을 받았습니다. 상 받았다고 해서 다 잘한 것은 아니지만, 상 받기 위해 일한 것 또한 없었으나 단체 운영에 도움이 된다면 주는 상을 굳이 거부하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이 사역을 시작하면서 상과 훈장, 언론의 노예가 되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이런 것에 취하기 시작하면 누구랄 것이 없이 추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위기청소년 사역을 시작하면서 그렇게 되지 말자고 다짐했었습니다. 남편인 제가 봐도 아내는 정말 열심히 일합니다. 사익보다 공익, 자신보다 이웃을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일하는 아내를 존경하고 있지만 물불 가리지 않고 일하는 아내가 혹시라도 쓰러지지 않을까? 염려의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길어졌습니다.
하고 싶었던 말, 감추었던 마음을
편하게 하다 보니 편지가 길어졌습니다.
형님, 덕분에 제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형님, 겨울이 오기 전에
따뜻함을 선물해주셔서 고맙습니다!
2025년 10월 15일 조호진 올림

▲지리산 흙피리 소년 한태주의 오카리나 창작 연주집 <하늘 연못>의 음반 표지.
※ 청와대 경호원 출신인 한치영 형님은 1982년 제3회 MBC 강변가요제에서 금상 수상 후 포크록 가수 생활 중 세속을 떠나 떠돌이 생활하던 중에 <아! 해남>(1999년) 등의 음반을 발표했습니다.
외아들 한태주군은 KBS 여행 프로그램 <걸어서 세계속으로> 테마곡 ‘물놀이’와 오카리나 연주곡 모음집 <하늘연못> 등을 작곡한 오카리나 연주자입니다. 그리고, 형수님(김경애)은 전자오르간 연주자로 현재 지리산자락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한치영 형님 가족의 동의를 구해서 나누게 되었습니다.
한치영 형님의 노래 ‘여보게 행복이 어디에 있던가’를 바로 아래에 링크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닌데!’라며 고민하는 분들께 꼭 들려드리고 싶은 위로의 노래입니다. 가을보다 더 깊은 노래를 들으면서 지친 삶을 다독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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