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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무명화가의 삶과 죽음

중증장애인 화가 고(故) 김지태 1주기 추모 예배


▲ 중증장애인인 김지태 작가의 생전 모습. ⓒ 조호진


2010년 봄, 서른 살 청년 김지태를

중증장애인시설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의 엄마는 어릴 적에 아들을 버리고 달아났고

비관한 그의 아빠는 술에 취해 살다가 떠났습니다.

그의 병은 치료가 어려운 유전성 질환으로

병명은 ‘듀시엔형 근이양증’, 이 병의 환자들은

대부분 20대 전후로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찬송가 중에서 특히 ‘샤론의 꽃 예수’라는 찬송을 좋아했습니다. 그가 ‘샤론의 꽃 예수’ 가사 중에서 3절 ‘샤론의 꽃 예수 모든 질병을 한이 없는 능력으로 고치사 고통하며 근심하는 자에게 크신 힘과 소망 내려주소서’를 간절히 부르는 것은 자신의 병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 하름교회 청년들이 김지태의 예배를 위해 병상에 누운 지태 청년을 예배당으로 옮겼습니다. ⓒ 조호진

▲ 하름교회 본당에서 예배드리는 김지태 청년과 오연근 장로(맨 왼쪽), 김순영 선생님, 하름교회 박은정 청년 그리고, 지태의 머리맡에서 성경을 읽어주고 있는 친형 같은 양원석 씨. ⓒ 조호진


병상에 누워 예배를 드리던 지태 청년이 하름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2010년 5월, 하름교회는 지태의 예배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예배 장소인 하름교회 본당은 3층입니다. 엘리베이터가 있긴 하지만 산소호흡기가 달린 이동 병상을 싣기에는 좁았습니다. 하름교회 청년들이 모인 것은 지태 청년을 3층 예배당으로 들어 올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지태의 교회 예배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긴 했으나 만일의 돌발 사태가 발생하면 그 책임이 가볍지 않기에 다들 긴장했습니다.


지태를 계단으로 옮기는 장면에서 이스라엘 ‘가버나움’이라는 도시에서 있었던 사건이 생각났습니다. 예수가 가난한 병자들을 치유해 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가버나움을 방문한 예수에게 치유받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중에 중풍에 걸린 친구를 낫게 해주고 싶었던 네 명의 친구가 중풍 걸린 친구를 예수께로 데려가 치유받게 하려 했으나 모여든 무리에 막혀 갈 수 없자 지붕에 구멍을 뚫은 뒤, 병상에 줄을 달아서 예수 앞에 내렸고 예수는 네 친구의 믿음에 감동해 중풍 병자를 치유했다는 일화처럼 지태 청년이 교회 예배를 통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했습니다.


하름교회 오연근 장로님은

하름교회 청년들의 장애인 쉼터 봉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1998년에 시작된 하름교회 청년들의 홍파복지원 장애인 봉사가 어느덧 20년이 넘었습니다. 주말이면 다른 청년들처럼 놀러 다니고 싶을 텐데 하름교회 청년들은 휴일을 반납한 채 장애인들을 섬기는 자원봉사를 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란 뜻을 깨닫기도 했고 교회 청년공동체 일원으로 사랑을 실천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컸습니다. 하름교회 청년들이 지태를 비롯한 쉼터 장애인들에게 사랑을 나누었으나 사실은 그보다 더 큰 사랑을 장애인들에게 받았습니다.”

▲ 노원역에서 첫 전시회를 연 김지태 작가의 작품. ⓒ 홍파복지원

장애인 무명화가 고(故) 김지태 1주기 추모 예배가 지난 3월 18일(토) 오전 11시 중증장애 아동시설인 ‘홍파복지원’ 쉼터에서 진행됐습니다. 김 작가는 열두 살에 입소한 홍파복지원 쉼터에서 29년 동안 지내다 2022년 3월 18일 코로나 감염 후유증으로 향년(享年) 41세를 일기로 본향인 천국에 갔습니다.


김지태 작가는 비록 무명작가였지만 중증장애를 극복하면서 인간승리를 증거 한 작가였습니다. 전신이 마비된 ‘근이양증’ 환자에게 그림 그리기는 무리한 도전이었지만 그는 도전했고 성공했습니다. 삼육재활학교가 쉼터에 파견한 강사에게 지도를 받은 그는 세필화, 민화, 파스텔화, 색연필화로 그린 작품 17점으로 2001년 2월 24일부터 28일까지 5일간 노원역에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첫 전시회를 앞두고 폐렴에 걸리면서 중환자실로 이송됐고 인공호흡기에 의지하느라 전시회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홍파복지원 장애인 쉼터의 김순영 선생님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들려주었습니다.

“지태에겐 부모에게 버림받은 상처가 있었으나 자원봉사자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아픔이 많이 치유됐고 그 힘으로 그림에 도전한 결과 수준급의 그림 솜씨를 보이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지태는 첫 작품 전시회에 대한 설렘으로 잠을 설치기도 했는데 ‘근이양증’ 환자에게 치명적인 폐렴에 걸리면서 사경을 헤매느라 자신의 전시회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지태의 유해는 파주에 있는 통일로 추모공원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무연고자나 다름없는 지태 유해가 추모공원에 안치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친동생처럼 보살핀 아름다운 사람 양원석 씨로 인함입니다. 보컬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원석 씨가 김 작가의 삶을 이렇게 들려주었습니다.

“지태는 오래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2008년이었나? 3년 이상 살기 어렵다고 했는데 마흔 넘게 살았습니다. 의학적인 판단을 뛰어넘은 지태의 생명 연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기적의 배경에는 사랑이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생전의 지태는 사랑을 먹고살았습니다. 장애인의 삶은 고통스러웠겠지만 많은 사랑을 먹고살다가 떠난 지태의 삶은 불행한 삶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 김지태 청년의 교회 예배를 위해 수고한 하름교회와 홍파복지원 관계자들이 예배 마친 후, 인근 공원으로 이동해 봄날을 즐긴 후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김지태 청년은 그 이후에도 한 차례 더 하름교회 본당에서 예배드렸습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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