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 기증하고 떠나신 어머니
- 소년희망배달부
- 3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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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쭉꽃을 좋아하셨던 어머니가,
봄에 태어났다고 춘자(春子)로 이름 지어진 어머니가
철쭉꽃 활짝 핀 봄길을 따라 돌아가셨습니다. 향년 87세.
어머니의 시신은 생전 뜻대로 경희대학교 의학계열실습지원센터에 기증됐습니다. 어머니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건 육신을 고이 벗어두고 떠나신 덕분입니다. 고령의 시신은 고인이 기증 등록을 했더라도 전염성 질환이나 심각한 외상 등의 문제가 있거나 유가족 중의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기증이 무산됩니다.
어머니의 시신을 검증한 코디네이터는 시신 인도 의사를 밝히면서 "수의도 관도 하지 마시고 돌아가실 때 입었던 옷 그대로 두어 달라"고 당부했고, 어머니는 수의와 관을 비롯한 값비싼 장의용품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훌훌 떠나셨습니다. 어머니의 시신은 지난 3월 30일 경희대 의학계열실습지원센터에 인도됐습니다.
경희대학교 의학계열실습지원센터(센터장 허영범)는 감사장을 통해 "고인께서 보여주신 숭고한 사랑과 희생정신은 전체 경희인은 물론 후대 자손들의 마음속에 길이 빛나리라 믿는다"며 고인의 뜻을 기렸습니다. 어머니 시신은 의학 발전을 위해 1~2년가량 사용된 후에 유가족에게 인도될 예정입니다.

신경림 시인의 시 '목계장터' 이웃 마을인 충북 중원군 소태면 양지마을에서 1940년 출생한 어머니는 11남매 중에 홀로 살아남았습니다. 형제 10명은 병으로 죽고, 전쟁에 끌려가 죽고, 강물에 빠져 죽고, 죽고 또 죽고... 생떼 같은 자식들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어머니는 눈을 감지 못한 채 돌아가셨고 아내와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아버지는 상실의 아픔을 노름으로 달래다 얼마 안 되는 가산마저 탕진했습니다.
열일곱 살 무렵에 무단 상경한 어머니는 춥고 배고픈 객지 생활의 서러움을 달래려고 배천 조씨(白川 趙氏)와 혼인했는데 알고 보니 나이 차이가 서너 살이 아니라 열여섯 차이였고 총각이라고 하더니 사실은 이북에 처와 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습니다. 조씨는 6. 25전쟁이 발발하자 이북에 아내와 아들을 두고 이남으로 잠시 피난 왔다가 3.8선 철조망에 가로막혀 불귀(不歸)한 '38 따라지'(이북에서 월남한 사람) 신세였습니다.
중매쟁이 거짓말에 속아 면사포도 쓰지 못한 채 '영등포 피난민촌'(현재 영등포 타임스퀘어) '하꼬방'(판잣집)에서 살림을 차린 어머니는 열여덟에 첫아들을 시작으로 3형제를 줄줄이 낳았습니다. 가난을 벗기 위해 노점에 뛰어든 어머니는 아기였던 저를 포대기로 싸매고 장사했는데 배고프다고 칭얼대면 등에 업힌 저를 돌려 젖을 물리면서 강냉이와 번데기, 오꼬시(쌀과자) 등을 팔았습니다.
그렇게 자식들과 먹고살려고 발버둥 쳤는데…. 물건을 빼앗고 걷어차는 노점상 단속반에 시달리던 어느 날, 자식새끼 먹여 살리는 일이 이렇게 큰 죄인가! 서러움에 북받친 어머니는 참다 참다 눈이 뒤집혀서 깡패 같은 단속반의 손을 물어버렸습니다. 그 사건 이후, 영등포 피난민 노점상 거리는 더 악질적인 보복 단속과 행패에 시달렸고 라이터와 만년필 등을 팔던 노점상 남편 조씨는 단속반에게 물건을 빼앗기고도 벌금을 납부하지 못해 영등포경찰서 유치장에서 구류 살기도 했습니다.
이 나라에서 가난은 죄였고 가난한 사람은 죄인이었습니다. 서럽고 괴로운 피난살이에 지친 남편 조씨는 술에 취하면 북녘 오마니와 북에 두고 온 처와 자식을 울며불며 부르고, 노점을 때려 치우고 경성방직 공장에서 일하다 폐병을 얻은 어머니는 아무리 싸워도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가난에 절망했습니다. 돈을 벌어서 이 지겨운 가난에서 벗어나리라, 아무리 피눈물을 흘리고 또 흘려도 달라지지 않는 팔자를 뒤집으리라! 다짐한 어머니는 아들 3형제를 두고 밤 봇짐을 쌌습니다.

어머니가 떠난 후 고등공민학교를 중퇴한 연년생 형은 불우 청소년들과 어울려 패싸움하고 물건을 훔치는 등 비행을 저지르다 소년원에 들어갔습니다. 소년원을 시작으로 경찰서와 교도소를 드나드는 '법자'(법무부의 자식) 인생을 살던 연년생 형은 "당신이 나를 버려서 내 인생이 망가졌다"면서 평생을 원망과 분노를 품고 살다 2년 전에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엄마 없는 판자촌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던 노점상 아바이는 1977년 행려병자로 발견돼 시립병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위기 청소년 사역에 뛰어들게 된 것은 아픈 가족사 때문이었습니다. 구치소와 소년원에 갇힌, 버림받은 아이들에게서 소년원 출신 연년생 형의 눈물을 보았고, 엄마에게 버림받은 거리의 아이들을 만나고 돌아온 밤이면 떠난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울다가 깨었고, 미혼모의 반지하 월세방에서 가난과 허기와 외로움이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이 사역에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공소시효도, 특별 사면도,
가석방도 없는 '자식 버린 죄의 감옥'에 평생 갇혀 살던
장기수 고(故) 안춘자씨는 2026년 3월 28일 봄밤에 석방됐습니다.

"사람들 귀찮게 하지 마라!"
어머니의 짧지만 굵직한 유언이었습니다. 여인숙 조바(종업원) 생활, 공사판 함바집 운영, 전라도 휘파리 골목에서 술장사를 하다가 망하고, 민속촌 파전 장사와 소머리 국밥 등의 장사를 하다 늙고 병든 어머니는 큰 숨 세 번 내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떠나셨습니다. 어머니는 생전에 ”내가 죽으면 거추장스러운 장례나 복잡한 절차를 밟지 말라“며 시신 기증으로 끝내달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파란만장했던 삶의 회한과 아픔을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신 어머니는 세상에 진 빚을 시신 기증으로 갚고 싶어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유언대로 '사람들 귀찮게 하는' 부고를 발송하지 않기로 하고 무빈소와 가족장으로 장례를 진행하면서 조문과 조의금을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그랬더니 근조 화환으로 위세를 떨거나 기죽을 일이 없었고, 조문과 조의금으로 인한 인간관계가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고, 조의금과 장례비 문제로 다투는 일 또한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일반 장례는 임종 직후에 영안실 시신 안치 → 장례식장 입실 및 빈소 준비 → 부고 문자 발송 등 장례 안내 → 조의금 접수 및 방명록 서명 → 조문객 접대 → 입관 → 발인 → 화장 또는 장지 이동 → 마무리 정산 등의 절차를 거칩니다. 하지만 어머니 장례는 영안실에 시신 안치 → 가정 추도 예배 및 발인 예배 → 시신 운구와 인도(경희대학교 의학계열실습지원센터) 등의 간소화 절차로 마무리됐습니다.
"어머니를 이제 하나님 품으로 보내드립니다. 슬픔 가운데 있는 가족의 마음을 위로해주시고 평안으로 함께하여 주옵소서. 고인의 삶을 기억하며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시고 남은 날들을 더욱 의미 있게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저의 집에서 진행된 어머니 추도 가정 예배에서 아내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3절)라는 성경 봉독을 한 뒤에 아들, 손자, 며느리 등이 어머니(할머니)와의 좋은 기억과 감사했던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추도 예배를 마치고는 저의 둘째 아들(33·소년희망공장 대표)이 위기 청소년에게 일터로 제공하는 커피숍으로 이동해 커피 등의 음료를 마시면서 부모 형제간의 우애를 다졌습니다.
저의 큰아들(36·UNIST 연구교수)은 무빈소 가족장에 대해 "제가 짧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경험하고 주위에서 들은 장례란 복잡하고, 힘들고, 돈이 많이 드는 것으로 알았다"라면서 "그런데 할머니 장례는 첫째 신선한 방식이었고, 둘째 복잡하거나 힘들지 않았고 셋째 할머니 추모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큰아들뿐 아니라 며느리를 비롯한 가족 모두가 "좋았다"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어머니의 인생은 결코 훌륭한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부모 형제를 일찍 여읜 어머니는 가난과 불화에 못 견뎌 자식을 버린 적도 있었고, 비윤리적인 색싯집 술장사를 하면서 거친 세상을 살았고, 교회 집사가 되어서도 성경보다 텔레비전을 더 사랑했고, 천식으로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담배를 끊지 못했고, 자식 손자들에게 존경받거나 사랑받은 적 없었던 어머니가 이대로 돌아가셨다면 가련한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인생은 해피 엔딩,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격언처럼 아픔과 고통의 세월을 훌훌 털어버린 마지막은 훌륭했습니다. 훌륭한 죽음으로 최후를 장식한 어머니, 모자지간의 오랜 상처와 불화를 치유와 화해로 녹인 선물 같은 죽음 덕분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담배 끊지 않고 왔다고 천국 입성을 거부하실 리 없으므로 안춘자 집사의 영혼은 버림도 버려짐도 없고, 아픔과 슬픔도 없는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실 것입니다.
어머니, 하늘나라에서
안식을 누리시길 빕니다.

상처와 눈물 그리고, 용서와 화해
버려진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서 쓴
소년의 눈물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가난에 화인 맞은 아이!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
가족이 해체되면서 떠도는 아이!
가족과 함께 사는 게 꿈이고 소망인 아이!
그 아이들의 아픔에 전이되면서
내면 어두운 곳에 숨어 있던 나의 아픔이
심연을 흙탕물로 만들어버렸던 것입니다.
판자촌에 홀로 버려진 아이가 불쌍해서,
오목교 뚝방길에서 추위에 떠는 아이가
짠해서 두 팔로 보듬어주었는데 가만히 보니
내가 내 팔로 나의 가슴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평생 낫지도 않고,
지울 수도 없는 아픔,
버림받은 아픔을 간직한 채
어머니를 원망하고 분노하며 살았다면
어머니의 죽음과 화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픈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
가난한 아이들에게 밥을 주는 것!
외로운 아이들을 꼭 안아주는 것!
그것은 나의 상처를 씻어주는 것!
그것은 나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었습니다.
[4월 후원자 명단]
강미경 강미원 강봉진 강창훈 고행숙 고현주 곽선희 권길선 권명숙 권미선 권수경 권수아 권영림 권차랑 그교회 김경희 김난주 김덕순 김도영 김도윤 김명호 김명희 김미령 김민수 김범준 김선애 김소영(1972) 김연례 김은숙 김종택 김준수 김춘지 김치하 김한나 김현겸 김현주(서울) 김현주(대구) 김혜미(김미진) 김혜순 김효정 남기창 남서울교회(비) 두현호 류제환 류창형 마옥이 맘맘(김순옥) 문상순 문정라 박미자 박병엽 박숙정 박아론 박영주 박예진(의정부범골로) 박예진(의정부오목로) 박재섭 박종선 박종택 박찬수 반태경 배현숙 법무법인에스 법무법인한누리 변종필 (사)마이아이비 사회적협동조합행복나눔 생명교회(엄경진) 서인수 소갑순 소광섭 소은정 소정열 손다은 손석봉 손성암 송금숙 신양선 신정아 신창선 신춘례 신희지 심정섭 심현정 안상숙 안성진 안은숙 안재진 안혜리 엄서영 엄효정 염춘화 오선예 오자연 유동현 유정숙 유희예 윤승희 윤이나 윤태경 (주)윤현상재 은평청파교회 은평청파교회깊은속(손영주) 이대성 이도경 이명우 이미자 이선희 이성민 이성숙 이소라 이수경 이슬기 이시영 이연주 이영미 이영숙 이영순 이영종(리빙웰치과) 이용규 이용창 이원태 이은경 이은미 이은주 이은희(서울) 이인영 이제승 이종선 이주은 이주희 이지은 이진아 이한승 이현정 이현종 이현죽 이혜원(부천) 이혜원(안양) 임태숙 임희정 장경숙 장유영 전유라 정경수 정선화 정성회 정윤경 정준오 정찬길 정현아 제성숙 조성록 조솔 조승 조영기 조우진 조현명 조현숙 조호진 진영숙 진종옥 차수련(연) 차영조 차향매 채성훈김유란 청파교회 최남식 최성초 최수길 최순희 최승주 최윤선 최윤성 최의승 최인식(류미라) 최희정 표대중 한국기독교장로회행복 한석훈 한성수 한여름 한영순 허윤 허의숙 현명숙 현지현 홍석경 홍영주 황재훈 황현성 황현숙 황홍구
<스마일어게인사회적협동조합>은 부천 지역 중도 입국 이주 청소년을 위한 <어게인학교>(경기공유학교), 위기 청소년의 자립을 돕는 카페 <소년희망공장>, 인천가정법원이 위탁한 보호소년 회복교육 등을 진행하면서 학교 밖 청소년 등의 위기 청소년과 미혼모 아기를 돕는 비영리 법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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