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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 예수를 만났습니다!

[조호진 시인의 소년희망편지] 그가 기다리는 세상은?



▲ 술에 취한 30대 남성의 방화로 불에 타고 있는 중림동 '약현성당' 화재 사진(서소문순교성지전시관 사진 촬영)


서울역을 떠돌던 부랑자 한 사람이

중림동 약현성당 안으로 기어들어와

커튼에 라이터를 켜대었을 때

성당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

     

불이야!

봄을 기다리던 제비꽃이

땅 속에서 소리쳤다

     

아무리 소리쳐도 성모님은

가만히 불길을 보고만 있었다

천장이 뚫리고 종탑이 무너져내려도

성모님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불이 꺼진 뒤

무너진 종탑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성당을 찾아온 부랑자들에게

애초부터 밥을 해주지 말아야 했다고

미사를 드렸다

     

그때 제비꽃은 들을 수 있었다

무너진 종탑에서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를

그들을 미워하지 말자

그들을 돌보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 크다고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를

     

(정호승 시인의 ‘약현성당’ 전문)


▲ 1년 6개월에 걸친 재복원공사 끝에 2000년 9월 원형에 가깝게 복구된 약현성당.

     

1998년 2월,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서양식 벽돌교회 건축물인 '약현성당'(서울 중구 중림동)이 서울역 일대를 떠돌던 부랑자(노숙자) 장(33세 남성) 아무개 씨의 방화로 본당 120평 가운데 80여 평이 전소됐고 성 요셉상과 성모마리아상 등 주요 유물들도 불에 타버렸습니다.

     

술에 취한 장 씨는 성당에 들어가 제단에 있는 커튼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면서 화재가 발생, 벽돌 구조물과 앙상한 잔해만 남긴 채 전소됐습니다. 장 씨는 경찰 심문에서 '예수님은 매 맞고 피 흘리며 온몸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고통받고 있는데 성모님은 그냥 미소만 짓고 있는 것이 화가 나서 불을 질렀다'라고 진술했다고 합니다.

     

약현성당은 1년 6개월에 걸친 재복원공사 끝에 2000년 9월 원형에 가깝게 복구하여 다시 한번 더 축성식을 가졌습니다. 화재 사건 이후, 성당 사람들은 밥을 얻어먹기 위해 성당을 찾아오는 노숙자들에게 밥을 해주지 말았어야 했다고 이구동성으로 의견을 모은 뒤, 그들이 성당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갔다고 합니다.

     

한편, 약현성당은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 '외젠 코스트' 신부(Eugene-Jean-Georges Coste)가 1891년 10월 건축을 시작, 착공 1년 만인 1892년 11월 준공돼 1893년 4월 축성식을 가졌으며 1977년 사적 제252호로 지정됐습니다.

     


▲ '서소문 역사공원' 벤치에 누워 계신 노숙자, 겨울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예수를 생각하면 눈물 나려고 한다.

     

겨울바람이 맵차게 불던 날,

눈이 내리고 쌓인 잔설이 녹던 날,

서울역 인근에 있는 서소문 역사공원 구석진

벤치에 누워 있는 노숙자 사내를 만났습니다.

     

그 사내는 한겨울인데도 얇은 담요를

얼굴까지 뒤집어쓴 채 벤치에 누워 있었습니다.

키가 커서였는지 담요는 사내의 몸을 다 덮지 못했고

담요 밖으로 삐져나온 그의 맨발 발등에는 누가 걷어찼는지,

날카로운 무엇으로 찔렸는지 깊게 팬 상처가 몹시 아파 보였습니다.


▲ 노숙자 예수에게 어느 누가 돌을 던졌을까. 날카로운 무엇으로 찍었을까. 흉하게 패인 맨발 발등이 내 발등처럼 아프다.

     

세상 사람들은 비난의 돌을 던집니다.

몸에서 악취가 난다고, 어서 꺼지라고,

일하지 않고 빈둥거린다며 손가락질하고,

대낮부터 술에 취해 누워 있다고 비난하면서도

그들의 아픔과 슬픔, 실패와 패배, 버림받은 인생을

씻어주지도, 안아주지도, 술 한 잔 따라주지도 않습니다.

     

내 인생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 역시 노숙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혼과 파산의 벼랑 끝에서 위태롭던 그 시절,

한 발만 헛디뎠으면 낭떠러지 아래 인생 밑바닥으로 추락해

슬픔과 절망의 술에 취해 뒹굴다가 야속하고 무서운 세상을 등진 채

노숙의 거리를 떠돌다가 행려병자로 비운의 생을 마쳤을지도 모릅니다.

     

노숙자, 그이들은 지독히도 운이 나빠서 인생 밑바닥으로 추락한 것입니다. 노숙의 생을 살려고 태어난 사람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인들, 가족과 연락마저 두절한 채 살고 싶었겠습니까. 끝내, 길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겠습니까. 대물림 된 가난과 아픔을 세습하여 살아가는 이웃들이 쓰러질 수밖에 없는 불공정한 세상입니다. 그런데, 대물림 된 부를 세습받은 자들이 불공정한 경쟁에서 승리자가 됐다고 쓰러진 이웃들을 비난하고 낙인을 찍습니다.

     

운이 좋아서 정주(定住)의 삶을 살아가는 그대들, 불공정 경쟁에서 승리자가 된 그대들은 노숙자들에게 쏘아 대는 비난과 낙인의 화살을 중단해야 합니다. 그대들이 향유하는 승자독식의 삶은 불공정한 게임에서 거둔 승리이므로 레드 카드를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들은 반칙을 일삼는데도 경고조차 받지 않는 불공정한 그라운드에서 거둔 승리를 부끄러워하긴커녕 승자독식의 특혜를 만끽하면서도 일말의 부끄러움조차 없습니다.

     

이생의 생만 살면 된다는 그대들은 무한 수익과 착취를 보장하는 자유시장 체제를 향유합니다. 집을 빼앗기거나 잃어버린 이들은 머리둘 곳이 없어 노숙하는데 그대들은 목숨 같은 집으로 투기하고 사기까지 칩니다. 피해자인 청년들이 하늘이 주신 목숨까지 끊으면서 살려 달라고, 대책을 세워달라고 부르짖는데도 사술(詐術)로 권력을 등친 권세가들은 고작 손잡아 주는 척만 하고 있으니….

     

거룩하고 선한 얼굴을 한 그대들이여! 그대들이 아무리 주여, 주여! 통성 기도로 외친다고 해도 인자(人子)는 그대들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불의한 오른손으론 가난한 이웃의 고혈을 짜내고 위선의 왼손으론 하늘의 복을 달라고 부정 청탁을 일삼는 그대들을 내 어찌 안다고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주여, 주여! 인자의 이름을 그토록 부르면서 어찌 나의 가난한 이웃을 피눈물 흘리게 한단 말입니까. 벼랑 끝 인생들의 손을 잡아 달라는 인자의 호소마저 외면한단 말입니까. 그리하여, 노숙자 예수께서 한 말씀 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마태복음서 제25장 40절)   


▲허기진 이웃에게 빵 대신에 돌을 던지는 각자도생의 세상, 얇은 담요 속 노숙자 예수의 겁에 질린 눈빛이 슬프다.

     

그래서, 노숙자 예수는 인적이 끊긴 서소문 역사공원

외롭고 서러운 벤치에 홀로 누워 얇은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엄동 추위와 굶주림에 오스스 떨고 있었습니다.

     

담요 속 겁에 질린 눈빛, 허기에 지친 퀭한 눈빛의 노숙자 예수는

인적(人跡)만 끊긴 것이 아니라 인정(人情)마저 끊긴 이 시대를 향해

야속한 사람들아, 제발 그러지 마시오, 그렇게 살면 봄이 오지 않을 것이오.

     

총과 대포를 쏘아대는 전쟁은 그래도 언젠가 종전(終戰)하지만

종전도 휴전도 없는 삶의 전쟁터는 지옥 같은 무한경쟁의 싸움터여서

가난하고 병들고 삶에 지친 인생들은 부상과 낙오로 쓰러지기 마련이라오.

그러면, 가난하고 배고픈 이웃과 병든 이웃들을 부축하는 게 인간의 도리이건만

나만 살면 된다는 그대들은 어찌하여 승자독식의 고지 점령에만 혈안이란 말이오!

     

그래서, 슬픈 제비꽃들은 '나를 생각해 달라'는 꽃말조차 남기지 못하고,

진달래 철쭉꽃들이 봄 산천 붉게 물들인다 해도 정녕 봄이 온 게 아니라고,

각자도생의 세파(世波)에 질려 말문을 닫은 노숙자 예수는 소리쳐 노하지도 못한 채,

엄동 바람에 시달리는 겨울 벤치에 언 몸으로 쓰러져 무한경쟁의 종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 예수는 누굴 위해 오셨을까. 버림받은 이들의 이웃이 되기 위해 버림받았고 그토록 오래도록 버림받고 계신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고아입니다.

그래서, 그는 한부모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주민입니다.

그래서, 그는 장애인입니다.

그래서, 그는 실직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빚쟁이입니다.

그래서, 그는 노숙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작은 자입니다.

     

예수, 그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사람들에게 버림받기 위해서입니다.

버림받은 자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서입니다.

버림받은 자의 이웃이 되어 함께 살기 위해서입니다.

등에 칼을 꽂고 떠난 배신자를 용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아프고 슬픈 인생들의 발을 씻어주고

그래서, 실패와 패배로 얼룩진 손을 잡아주고

그래서, 외롭게 살다 죽어가는 무연고자와 함께 죽고

그래서, 목마르고 팍팍한 인생의 목을 축여주고 싶어서

2천 년이 넘도록 버림받았고 오늘도 버림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버림받길 원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버림받기를 원합니다.

엄동설한엔 맨발로 버림받고, 버려지고

허기지고 굶주려 배 움켜쥐고 누워 있고

얇은 모포 한 장으로 한파에 시달리면서도

     

정녕, 이녁이 짠해서 맘에 걸리거든

맨 몸으로 버려진 노숙자 예수인 나보다

더 가난하고 더 병들고 더 실패한 이웃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해 달라고 신신당부합니다.

눈물이 얼음이 되기 전에 눈물 닦아달라고 부탁합니다.

전쟁과 경쟁이 아닌 연대와 평화로 함께 살라고 청합니다.

욕망의 고지만 쳐다보지 말고 버려진 이들이 신음하는 세상

밑바닥 인생의 눈물 나는 삶을 감싸 안아달라고 노숙자 예수가,

쓰러진 예수가, 추위에 지친 예수가, 배고픈 예수가 부탁합니다.   


▲ '서소문 역사공원' 벤치에 누워 계신 노숙자

     

티모시 슈말츠와 서소문 역사공원

     

1969년 생 캐나다 출신 작가인 ‘티모시 슈말츠’(Timothy P. Schmalz) 작품인 ‘노숙자 예수’(Homeless Jesus, 215×92×72cm, 청동주조, 2013)는 마태복음서 제25장 40절을 묵상하며 제작한 작품으로 소외와 고통을 당하는 이들이 한 사람도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 있습니다. 1969년생인 '티모시 슈말츠'는 노숙인을 비롯해 난민과 인신매매 문제 등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티모리 슈말츠’는 세계난민의 날을 기념하여 성 베드로 광장에 설치한 ‘부지중의 천사’(angels unawres)라는 제목의 대형 조각품에서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를 난민 대열에 앞장세웠습니다. 작가는 히브리서 제13장 2절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라는 성경 구절을 묵상하며 작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노숙자 예수’가 어느 성당 앞에 처음 설치됐을 때, 예수의 신성을 모독한 작품이라는 수많은 항의와 비난을 받고 철거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이 ‘바티칸 인근에서 동사한 노숙인을 기리기 위해 ’노숙자 예수‘를 설치하고 싶다’는 설명과 함께 프란치스코 교황이 ‘노숙자 예수’ 작품을 직접 축복하면서 인정을 받고 주목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노숙자 예수’는 현재 로마 교황청 성 베드로 광장과 캐나다 토론토 공원, 스페인의 마드리드, 아일랜드의 더불린,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등 세계 각지에 설치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서울에 설치된 ‘노숙자 예수’는 한 노숙자의 방화로 전소됐다가 복원한 한국 최초의 성당인 ‘약현성당’(1892년 서울 중구 중림동) 근에 있는 ‘서소문 역사공원’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서소문 역사공원’은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로 순교한 한국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 베드로와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98명의 천주교인이 순교한 ‘서소문 처형장’이 있던 곳으로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한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지하 1~3층)이 2019년 개관됐습니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 02-3147-2401, 서울시 중구 칠패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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