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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너무 많이 벌렸습니다!

19시간 전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2시간 전

[9월 감사편지]


#. 1


지리산 자락에 사시는

한치영 형님과 형수님께서

가난한 아이들 돕는 데 사용하라고

올해도 300만 원을 보내주셨습니다.

 

청빈한 삶을 선택하신 형님 부부께서

이 엄청난 후원금을 보내시기 위해서

얼마 안 되는 노인 연금을 아끼고 또 아껴서

1년 치의 사랑으로 보내셨을 생각을 하면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형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예의 그 털털한 웃음으로 반겨주셨습니다.

 

“아우님, 고생이 많지….”

 

후원금 보낸 것에 대한 인사를 받는 것이

어색한 형님은 멋쩍은 듯 간단한 안부를 물었고

언제나 씩씩하고 당찬 형수님이 큰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가난한 아이들 돕는 일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이에요.”

 

형수님이 기죽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생이 많은 일이지만 기쁜 일이니 힘내라고

용기를 북돋워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가슴을 울립니다.

 

“너무 힘들면 지리산으로 오세요.

아프기 전에, 쓰러지기 전에 와서 쉬었다 가세요.”


 

#. 2

 

살아남아야지!

밀려나지 말아야지!

어떻게 든 싸워 이겨야지!

 

전쟁터 같은 이 도시에서 살아 남으려고 검투사처럼 굴다보니 사나운 도시를 닮아버렸습니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사는 건 사람답게 사는 길이 아닌데,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 지리산 형님처럼 황매산에 사는 동인처럼 살고 싶은 마음 굴뚝 같은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면서 서로 배려하고 환대하면서 살고 싶은데, 가을 하늘을 푸르게 날아가는 새들처럼 자유로운 새들처럼 날고 싶은데….

 

왕복 3시간가량의 출근 전쟁 도로에 나서면 그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온 신경과 세포가 칼날처럼 곤두섭니다. 끼어들고, 칼치기하고, 압박하고, 위협하고, 비상등과 경적이 총탄처럼 빗발치는 이 도로에서 살아남으려면 잠시의 한눈팔기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고, 내일도 살벌할 수밖에 없는 이 도시를 떠날 순 없을까. 이 도시처럼 사나워진 마음으로 가난한 아이들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늙고 병든 원미동 할머니를 따뜻하게 살펴드릴 수 있을까.

 

저에겐 어진 동인(同人)이 있습니다. 올해로 서른세 해째 사귀고 있는 58년 개띠 서정홍 시인은 경남 합천 산골짝에서 농사와 시를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인이 위암에 걸렸습니다. 세상의 온갖 죄란 죄는 다 짓고 사는 사람들이 밤하늘 별처럼 수두룩벅적한 이 세상에서 하필이면 선한 농부이자 시인에게 암이라니, 하느님도 가끔가다 실수를 하신다는데 그 말이 사실이네, 사실이야. 하늘을 원망하며 째려보는 저와 ‘일과시’ 동인들에게 서정홍 시인이 평안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암이) 다른 사람에게 가지 않고 내게 와주어서 감사합니다”

 

그는 그런 사람입니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큰아들이 시각장애 1급 여성과 결혼하겠다고 하자 “건강한 사람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과 사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말하면서 시각장애 큰며느리를 환영한 시아버지이고, 손자가 태어나자 사흘 동안 농사일을 쉬었던 농부입니다. 산밭에 괭이질하다가 지렁이 한 마리라도 찍으면 마음이 짠해질 테니까 농사를 쉬었고, 손자가 살아갈 세상을 조금이라도 맑게 하고픈 생각에 석 달 동안 채식했던 좋은 할아버지입니다. 

 

지리산 한치영 형님처럼, 서정홍 시인처럼 살고 싶지만 저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피난민촌에서 태어나 신정동 오목교 뚝방 판자촌에서 노점상 아바이와 살다가 어릴 적 헤어졌던 오마니를 만나 홍등가인 휘파리 골목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저는 이 도시를 떠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이 도시에 남아서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가난한 이주 청소년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합니다. 늙고 병든 원미동 할머니의 이웃이 되기 위해서라도 이 도시를 사수해야 할 것 같아서 여기서 살겠습니다.

 

#. 3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한참 망설이다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가난한 아이들과 이웃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실 그대로 고백하면 노후 빈곤 문제입니다.

 

가난한 아이들과 이웃을 돕는다고 말을 해왔습니다만

저를 돌아보니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을 돕고는 있지만 어느덧 제 삶이 얹혀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돈을 받고 있지만 가난한 이들 덕분에 먹고 살고 있습니다.

이대로 떠나면 노후 빈곤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어서 힘들지만 버티고 있습니다.

그토록 사납게 굴던 도시의 여름이 떠났으니 이 가을엔 여러분에게 용서를 빕니다.

 

가난한 아이들 돕는다면서 손을 너무 많이 벌렸습니다. 고마운 여러분에게 진 신세의 일부라도 갚고 싶은데, 어떻게 갚으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서정홍 시인의 책을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I와 숏폼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책은 귀찮고 무거운 선물이라는 비아냥이 떠돌고 있지만 그래도 병든 영혼을 치유하는데 가장 좋은 선물은 어진 시인이 쓴 책이라는 생각에 서정홍 시인의 산문집 <희망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교육공동체벗·2025)를 선물로 골랐습니다.

 

“우리 자식들이 부자가 되면 안 되는 까닭은, 하늘에 떠 있는 별만큼이나 많다. 한 사람이 부자가 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가난해질 테니까. 정직하게 땀 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길 테니까. 사람이고 자연이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돈으로 보일 테니까. 함부로 먹고 마시고 쓰고 버리고 허깨비처럼 살다 보면 아이들이 살아갈 ‘오래된 미래’인 숲(자연)을 짓밟을 테니까.” (<희망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 309쪽)

 

서정홍 시인은 경남 합천 황매산 기슭 작은 산골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열매지기공동체’와 ‘담쟁이인문학교’를 열어 이웃과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깨달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여러 시집과 동시집 그리고 산문집을 냈으며 전태일문학상과 권정생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서정홍 시인의 산문집을 받고 싶으신 분은 어게인 메일(teenagain@again.or.kr)로 주소 보내주시면 꼭 보내드리겠습니다.

 

힘든 길이 아니라 기쁜 길입니다!  



새벽 5시에 깨어

길 나서는데 비 내린다

어둠 뚫은 새벽 비 무겁다

봄에 집 떠났는데 가을이다

그렇게 일하다 큰일 난다고

누구는 뇌출혈로 쓰러졌다며

우리 부부의 사역을 염려했다

출퇴근 시간 아끼려고

부천 오피스텔 얻어 살다가

사무실에서 침낭 깔고 잤다

찬물에 씻어도 그간 괜찮았는데

처서 백로 지나자 몸이 오스스 떤다

아내가 생일 선물로 아로나민 사달란다

눈이 흐릿해졌다 피곤 누적을 호소한다

부모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소년의 눈물을 닦아주리라 나선 길

거리 아이들 밥 먹이려고 나섰다 엎어진 길

밥 주면 돈 달라하고 왜 또 안 주냐며 엎는 길

그만 가자, 그만 집으로 가자 했다가 또 나선 길


'5년 전 일기'라는

제목의 제 졸시입니다. 


저는 이 길을 힘든 길이라고 했지만 지리산 형수님은 힘든 길이 아니라 기쁜 길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제가 이 짓을 벌인 까닭은 슬픔 때문이었습니다. 유년 시절, 엄마 없는 아픔을 겪었던 저는 버림받은 소년들의 눈물이 내 고통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위기청소년의 눈물을 닦아주리라! 하고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눈물을 닦아주는 일은 쉽지만 그것을 지속적으로 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규칙과 간섭을 싫어하는 예술가 기질(MBTI-ISFP)인 저에게 비영리단체를 조직하고 운영한다는 것은 역부족이고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논리와 효율을 중시하는 전략가형 아내(INTJ), (재)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사무국장 출신으로 여러 비영리단체에서 30년 넘게 활동한 아내의 수고와 헌신 덕분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점점 쓸모가 적어지는 제가 생존하려면 바짝 엎드려야 합니다. 낙엽처럼 벽지처럼 착 달라붙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부끄러워지므로 하늘에선 '순종'(順從 순순히 따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인생이지만 순종하면서 이 길을 걷겠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진심을 다해 걷겠다는 다짐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하늘을 어떻게 속이겠습니까. 진실함으로 걷겠습니다.


지리산과 황매산에 뜨는

한가위 달이 훨씬 밝고 둥글겠지만

저는 부천의 달을 보면서 빌겠습니다.


아픈 사람이 덜 아픈 세상이 되게 해달라고!

변두리 아이들이 희망의 길을 걷게 해달라고!

가난한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이들이 잘되게 해달라고!

모두 모두 넉넉하고 행복한 한가위를 보내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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