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지팡이
[소년이 희망이다 12화] 2016-06-07

예술계 특수학교인 예원학교 학생들과 함께 ⓒ 김진석
학교전담경찰관 왕태진(52․남대문경찰서) 경위는 매일 아침 6시면 집을 나섭니다. 학생들의 안전한 등교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17년째 이어지고 있는 이른 출근은 상부의 지시가 아닙니다. 학생들의 안전을 도와야 한다는 사명감이 부추긴 자발적 출근입니다.
"20년 전, 등교 안전 지도하는 제 눈앞에서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가 교통사고를 당해 3개월간 뇌사상태였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침밥 잘 먹여 보낸 자식이 교통사고를 당하면 부모 심정이 어떨까..2000년 딸을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면서 내 아이와 같은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 등하굣 길 교통사고 예방에 나섰습니다."

지난 5월 18일 예원학교에서 열린 '행복한 학교 만들기 포스터 공모전' 수상
작품 순회전시회 ⓒ 김진석
지난 3일 이른 아침 그와 동행했습니다. 관내인 이화외고에 도착한 그는 학생・교사들과 아침 인사를 나누면서 학교 곳곳을 순찰한 뒤에 덕수초교로 옮겨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새겨진 캐릭터 연필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는 연필뿐 아니라 캐릭터 호루라기, 열쇠고리, 물티슈 등의 홍보물을 영업사원처럼 나누어줍니다. 보물을 나눠주는 까닭은 이렇습니다.
"학교전담경찰관이 항상 곁에 있으니 언제든 연락하라는 뜻입니다. 관계가 형성되고 친해져야 말하고 들을 수 있습니다. 말하고 듣기만 해도 문제의 절반은 해결됩니다. 학생에겐 큰 문제지만 들어보면 큰 문제가 아닌 경우가 태반입니다. 학교폭력 문제는 학생들과 어울리고 부딪쳐야 해결됩니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빠 혹은 삼촌 같은 경찰
짭새 아닌 민중의 지팡이로 인정

덕수초 학생들에게 캐릭터 연필을 나눠주는 왕태진 경위 ⓒ 조호진
남대문경찰서 관내 학교에서 그는 유명인사입니다
이종기 예원 학교장이 '학생들이 교장선생 이름은 몰라도 학교전담 경찰 왕태진 경위의 이름은 다 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각 학교 급식실 및 학교 정문엔 그의 사진과 전화번호가 새겨진 배너가 세워져 있습니다. 학생들은 무서운 경찰보다 친절한 경찰을 좋아합니다.
김순임(43) 덕수초 녹색어머니회 회장은 왕 경위를 "아빠 혹은 삼촌 같은 경찰"이라면서 "친절하고 부지런한 왕 경위께서는 아침저녁 등하굣길은 물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와 친절하게 도와준다"고 칭찬합니다.

'행복한 학교 만들기 포스터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예원학교 2학년 이유진
학생과 함께 ⓒ 김진석
지난해 연말엔 창덕여중 한 학생이 전화했습니다. 친구네가 전세금을 떼였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어서 당황했지만 속으론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폭력 문제뿐 아니라 생활 문제까지 상담한다는 것은 마음을 열었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짭새'가 아닌 '민중의 지팡이'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그는 기뻐했습니다.
화해와 용서의 메신저 역할도 했습니다. '은따'(은근한 따돌림)를 방치하면서 악화된 사건을 그가 신속하게 개입해 조치하자 피해 학생 아빠의 감정이 누그러진 것입니다. 그는 가해 학생들이 깊이 반성하는 모습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피해 학생 아빠가 용서했고 가해학생에 대한 처벌은 중단됐습니다. 학교의 안이한 대처와 부모의 감정 대립이 학생 싸움을 부모 싸움으로 확산시킵니다. 그러므로 학교폭력 해법 또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백골 여중생이 발견돼야 반응하는 후진 사회
강력범 검거보다 중요한 건 범죄예방과 교육

꿈터 참여 학생들과 함께 ⓒ 조호진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해야 반성하는 나라는 후진국입니다
아빠의 폭력에 의해 부천 여중생이 백골 시신으로 발견되는 등 비극적인 사건이 잇따르고 있음에도 이내 망각하고 반복하는 사회는 무지한 사회입니다. 이 나라에서 예방치안의 길을 묵묵히 걷는 그는 바보 경찰입니다.
지구대 근무할 때 비번이면 관내 학교를 찾아가 학교폭력, 성범죄, 사이버폭력, 청소년 자살 등 4대 예방교육을 했습니다. 학생뿐 아니라 학부모와 교사들에게도 교육합니다. 삼위일체로 교육해야 효과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17년 동안 600여 회에 걸쳐 55만 명에게 무료로 강의했습니다.
학교전담 경찰이 된 2013년 주말부터든 '꿈터'와 '꿈트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꿈터'(Dream School)는 학교폭력 가・피해자, 학교 부적응자, 모범생 등 기수별로 40명을 모아 문화체험과 봉사활동 등을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꿈트리'는 학교 밖 청소년들의 비행예방과 자립을 돕는 활동입니다.

학교폭력 역할극을 하고 있는 꿈터 학생들 ⓒ 조호진
꿈터 학생들은 격주 토요일마다 '덕수궁 함녕전'(고종황제 침전)을 청소한 뒤 학교폭력 예방 프로그램에 참여합니다. 꿈터 학생들은 "재미있고 이해하기 쉽게 가르쳐 준다"고 입을 모읍니다. 전문 강사진이 진행하는 역할극을 통해 피해자의 고통을 느끼면서 학교폭력 방관자도 가해자와 마찬가지로 나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꿈터 2기 한 학생의 참가 소감입니다.
"자살예방교육을 듣고 나서 생각이 많이 변한 것 같아요. 힘들어도 이제는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요. 친구들이랑 학교폭력 연극도 해보니 피해자와 가해자들의 생각도 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좋은 시간이었어요!" - 꿈터 2기 김나은 -
남대문경찰서는 학교폭력 청정지역
31개 서울경찰 중 자랑스러운 꼴찌

남대문경찰서는 학교폭력 청정구역 ⓒ 김진석
왕태진 경위는 학교전담경찰관에겐 사명감과 열정 그리고 전문성이 요구된다고 강조합니다. 청소년학을 전공한 그는 서울시교육청 명예교사이자 서울시립청소년문화교류센터 기획위원입니다. 그리고 청소년지도사(2급)와 학교폭력 상담사(2급), 미디어 중독 상담사 등 5개의 청소년 자격증 소지자입니다. 그가 사명과 열정을 다해 구축한 것은 학교폭력 청정지역입니다.
남대문경찰서에 따르면 2015년 31개 서울 경찰서 '117 학교폭력 신고센터'에 접수된 학교폭력 신고 17100여 건 가운데 남대문경찰서에 신고된 사건은 불과 12건입니다. 불철주야 학교폭력 예방에 힘쓴 결과입니다. 학교폭력에 의한 희생과 갈등비용을 감안하면 막대한 예산 절감입니다.
학교폭력 청정지역 구축에는 남대문경찰서 청소년 문화발전위원회의 역할이 큽니다. 이 위원회에는 병원장과 기업체 CEO, 대기업 임원, 은행 부행장, 대학교수 등 21명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양우진(60․서울 중앙의료원 대표원장) 위원장은 6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왕 경위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청소년을 위해 매주 토요일을 쉬지 않고 봉사하는 왕태진 경위를 보면서 미안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청소년 문화발전위원들이 바쁜데도 적극 참여하는 것은 왕 경위를 비롯한 남대문경찰서 여성청소년과 직원들의 열정 때문이기도 합니다. 왕 경위처럼 묵묵히 헌신하는 경찰들이 인정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정폭력 피해자인 희망이를 격리해야만 하나요?
"3년간 더 보살피면 진짜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꿈터에 참여한 희망이와 왕태진 경위 ⓒ 조호진
희망(16․가명) 이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6월입니다. 희망이 집을 찾아갔더니 희망이 엄마(41)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혼한 희망이네는 아무리 찾아봐도 희망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공과금이 체납될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정부 지원은 미치지 못했습니다. 왕 경위가 담당 사회복지사를 찾아가 호소하면서 희망이네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됐습니다. 참 다행입니다.
희망이가 거리 소년이 된 것은 부모 이혼 때문입니다
특히, 아빠의 폭력에 시달리다 가출과 쉼터 그리고, 가출팸 생활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런 희망이가 학교로 돌아온 것은 기적입니다. 유급 닷새를 남긴 희망이는 왕 경위의 손에 이끌려 학교에 갔고 학교는 왕 경위 때문에 받아들였습니다. 왕 경위는 희망이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갔습니다. 아이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영화관과 패스트푸드 가게에 데려가는 등 아빠처럼 돌봤더니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제는 가출하지 않고 학교에 잘 다닐 거예요!"
희망이의 다짐에 가슴이 울컥거렸습니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불신에 가득 찼던 희망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왕 경위는 희망이의 든든한 울타리였습니다. 학교생활에 적응해 가던 지난해 11월 희망이가 서울소년분류심사원에 인치 됐습니다. 가출팸 생활 당시의 폭행사건이 밝혀진 것입니다. 왕 경위가 판사에게 선처를 호소하면서 희망이는 가까스로 풀려났습니다.
중학교 3학년인 희망이는 선도부원이 됐습니다. 왕 경위가 학교에 부탁한 것입니다. 희망이가 변한 것은 그의 사랑과 관심 때문입니다. 또다시 가출할 것으로 예상했던 교사들도 놀랐습니다. 하지만 아빠의 폭력에 의해 전이된 분노조절장애는 여전히 문제였습니다. 그의 요청으로 순천향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가 지난 3월부터 분노조절장애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꿈터 참여 학생이 풍선에 쓴 글 ⓒ 조호진
그런데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1년 선배와 시비 끝에 서로 합의하에 뜬 맞짱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서로 치고받았는데 선배 아빠가 신고하면서 폭력학생으로 붙잡혀 간 것입니다. 희망이 엄마는 "선배 아빠를 찾아가 치료비를 드리겠으니 합의해달라고 무릎 꿇고 사정했는데도 봐줄 수 없다고 했다"면서 "희망이를 위해 발 벗고 나선 왕 경위님께 죄송하다"며 울먹였습니다. 왕 경위는 가정폭력 피해자인 희망이를 포기해선 안 된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발적으로 발생한 쌍방 폭행 사건인데, 희망이를 겨우 살려났는데, 분노조절 장애 치료를 시작했는데 이렇게 낙인찍고 처벌하면 어떡합니까. 희망이는 현재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희망이의 폭력성은 아빠의 가정폭력에 의한 상처입니다. 가정폭력 희생자인 희망이를 이대로 포기하면 절망의 길로 빠질 수 있습니다. 앞으로 3년간 더 희망이를 보살피면 진짜 희망이가 될 수 있습니다. 판사님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호소하려고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부자 아빠 부패 공직자를 원하십니까? 가난한 아빠 청렴한 공직자를 원하십니까?

예원학교 학생들과 함께 ⓒ 김진석
왕태진 경위는 최근 업무 과로와 스트레스로 안구 실핏줄이 터졌습니다. 큰딸(23)이 기흉으로 병원에 입원했지만 학교 밖 청소년들을 보살피느라 가보지 못했습니다. 청소년 주말 프로그램 때문에 부친 제사를 앞당긴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족들은 그의 든든한 지원군입니다.
그의 아내(52)는 꿈터 학생이 야외 활동을 할 때마다 40명의 간식을 포장하고, 디자인 전공자인 큰딸(23)은 청소년 문화제 포스터를 디자인해주고, 작은딸(20)은 PPT 교육 자료 작성을 도와줍니다. 넷째 사위인데도 장모님을 15년간 봉양한 그는 빵점 아빠도 불효자도 아닙니다.
그는 "가족들이 도와주어서 봉사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고마워하면서 "하지만 진급에 신경 쓰지 못한 탓에 하위직 경찰로 머문 점이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씁쓸하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계급이 낮다고 무능한 아빠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성실하고 청렴한 경찰 아빠라며 존경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아빠를 원하십니까? 부정부패로 수십억 혹은 수백억을 챙긴 고위 공직자 아빠를 원하십니까. 검소하고 청렴한 하위직 아빠는 원하십니까.

꿈터 참여 학생들과 함께 ⓒ 조호진
※ [소년이 희망이다]는 조호진 시인이 2016년 3월부터 6월까지 <국민일보>와 다음카카오에서 동시 연재한 스토리펀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