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점상 아버지와 연년생 형과 나의 어린 시절.
총명했던 연년생 형
어릴 적의 형은 총명했습니다. 형은 딱지 따먹기나 구슬치기를 해서 잃은 적이 없을 정도로 재주가 좋았고 승부 근성도 뛰어났습니다. 제가 동네 아이들에게 얻어맞을 때면 형은 마징가 Z처럼 나타났고 그러면 아이들은 덜덜덜 떨 정도로 싸움도 잘했습니다. 형이 이대로 잘 컸으면 좋은 재목이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가출하면서 총명했던 형의 눈빛이 원망의 눈빛으로 바뀌었습니다. 노점상인 어머니와 아버지는 가난 때문에 자주 다투었습니다. 어머니가 떠난 뒤, 학교를 자퇴한 형은 신문을 팔고 구두닦이를 하면서 비행 청소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패싸움을 하고 물건을 훔치다 붙잡혀 소년원에 갔습니다.
▲당시 보도된 연쇄 방화사건.
소년은 왜 방화범이 됐을까?
다문화 청소년 진원(가명·당시 17세)이를 처음 만난 곳은 2012년 5월 성동구치소 접견실이었습니다. 3개월간 다섯 차례나 불을 지른 혐의로 구속된 것입니다. 경찰 조사 결과 진원이는 다문화라는 이유로 차별과 왕따를 심하게 당했고 우울증을 앓다가 학교까지 그만두었으며 이런 반감으로 불을 지르게 됐다고 경찰이 밝혔습니다. 이런 사연이 알려지면서 종교인과 정치인들이 탄원에 앞장섰고 언론은 다문화 차별 문제를 이슈화했습니다. 언론이 관심을 쏟은 데는 진원이네 불행한 가족사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소년의 출생지는 모스크바입니다.
러시아 유학생이었던 한국인 아빠와 공산당 간부의 딸이었던 러시아 엄마가 국경을 뛰어넘는 사랑을 하면서 진원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지면서 두 살배기 아기였던 진원이는 친할머니 품에 안겨 한국에 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남은 공부 때문에 모스크바에 남았던 아빠는 진원이가 귀국한 다음 해인 1997년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소년에게 한국은 슬픈 나라였습니다.
친구들은 하얀 피부를 가진 진원이를 '러시아 튀기', '쏘련놈'이라고 부르며 놀렸습니다. 몸이 허약한 진원이는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조부모는 손주의 병을 고치기 위해 정신과 치료를 했지만 할아버지의 사업체가 IMF 사태로 부도나면서 치료는 중단됐고 반지하 월세방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연쇄 방화사건을 일으키기 1년 전, 가출한 진원이를 찾아 나섰던 할머니가 그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소년이 수감됐던 성동구치소.
‘어쩌면 이 소년도 형처럼 살아가겠구나!’
성동구치소 접견실 칸막이 너머, 진원이의 눈빛은 연년생 형의 눈빛처럼 버림받은 아픔과 원망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진원이 눈빛과 형의 눈빛이 겹쳐지면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 소년도 형처럼 살아가겠구나!', 소년원에서 나온 형은 경찰서와 교도소를 드나드는 사회 부적응자로 살았습니다. 환갑이 넘었는데도 그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연년생 형, 이 아픔은 언제쯤 끝날지 막막합니다.
버림받은 사람 중에 평생을 미아(迷兒)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청년이 되고, 성인이 되고, 노인이 됐는데도 버림받은 아픔과 슬픔 때문에 인생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를 그 누가 얼마나 따뜻하게 품어주겠습니까. 자신을 낳아준 엄마에게 버림받았는데 그 누굴 믿고 살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버린 엄마를 미워하면서도 그리워하는 슬픈 이들의 흘리는 피눈물…
진원이를 도운 것은 나도 아팠기 때문입니다. 노점상 아버지는 형이 구속됐는데도 변호사를 선임하지도 못했고 탄원서로 선처를 구하지도 못했습니다. 진원이의 유일한 보호자인 할아버지는 뇌경색을 앓고 있어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탄원서를 썼습니다. 연쇄 방화사건의 책임을 소년에게만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진짜 범인은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는 이 세상이라고, 소년에겐 처벌보다 치료가 급하다고 호소했습니다.
소년의 딱한 처지에 공감한 정치인들이 탄원에 동참하면서 소년은 한 달간의 정신과 치료를 받은 뒤 보호 치료시설에서 5개월간 생활하는 6호 처분의 선처를 구했습니다. 6호 처분을 마치고 나온 진원이는 가출한 자신을 찾다가 돌아가신 할머니 납골당을 찾아가 속죄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아빠의 납골당에선 잠깐 고개 숙이고 말았습니다. 진원이에게 아빠는 납골당 번호 10350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소년의 죄를 만나거든 부디 관용을 베푸시길.
소년상 앞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다니
어머니가 가출한 것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인숙 종업원과 식당 운영 등으로 돈을 번 어머니는 삼 형제를 거두었습니다. 어머니는 소년원에서 나온 형을 기술학원에 보내는 등 뒷바라지를 했지만 형의 방황은 계속됐습니다. 자식 곁을 떠난 죄의 공소시효가 한참 지났는데도 형은 술에 취하면 어머니에게 “왜 나를 버렸었냐?”라고 원망합니다. 자식 버린 죄의 멍에에서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요.
형은 원망이라도 하지만 진원이는 원망조차 못합니다. 엄마가 너무 먼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진원이는 23년이 넘도록 엄마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까마귀와 까치가 노둣돌을 놓아주지 않아서일까요. 설사 오작교가 놓인다고 해도 모정(母情)과 부정(父情)을 모르는 진원이는 그 다리를 건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부모에 대한 기억도 그리움도 없는 아이, 사랑받은 적도 없는 이 아이는 무슨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나요?
진원이의 사회적응을 돕기 위해 제가 일하던 사회복지시설과 저의 집에서 데리고 살았습니다. 운전면허시험을 보고, 같이 여행하고, 성경을 읽는 등의 생활을 통해 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알코올에 중독된 진원이는 술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수시로 가출하고 노숙자로 떠도는 옛 생활로 돌아가길 반복했습니다. 그러다가 소년원과 교도소에 잇따라 수감됐습니다. 주변에선 저에게 헛수고 그만하라고 했습니다.
2015년 7월 남부구치소 1호 접견실, 수인번호 2072번을 단 진원이가 나타났습니다. 얼굴엔 불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고참과 말다툼하고 작업을 거부한 잘못으로 받은 징벌 때문에 가석방이 불허됐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는 손주에게 영치금 10만 원을 넣었습니다. 노인연금으로 받은 20만 원에서 절반을 떼어낸 것입니다. 손주 옥바라지에 지친 할아버지는 전립선암 수술을 받고 현재 투병 중입니다.
진원이가 안산 소녀상 모욕 사건에 연루됐다는 소식을 듣고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 회복을 위해 만든 조각상 앞에서 일본말로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다니…. 일베로 활동하는 진원이는 자신도 차별의 고통을 겪었으면서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정 사람들을 차별하고 혐오했습니다. 러시아는 미개한 나라가 아니라면서… 형과 같은 불행한 삶을 살지 않도록 돕고 싶었는데 물거품이 됐습니다.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 피의자 B로 방송된 진원이의 다문화 혐오 발언.
아이들에게 밥과 잠자리와 사랑을 주면 될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피난민이었습니다. 보름달이 뜨면 오목교 뚝방에서 북녘에 계신 오마니를 부르며 울었습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를 한탄하다 행려병자로 숨진 아버지… 가리봉에서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정 돕는 일을 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눈물을 닦아드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코리언드림을 품고 한국에 왔다가 산업재해와 임금체불 등으로 쓰러진 나그네들의 눈물을 닦아드려고 가리봉에서 6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진원이를 만나면서 활동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진원이 때문에 보호관찰소와 소년원을 다니다가 버림받은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가정법원이 위탁한 아이들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밥과 잠자리와 사랑으로 품어주면 아이들의 아픔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돈을 털어갔습니다. 사흘 뒤에 또 털어갔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겠지? 생각했는데 아이들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흔들린 것은 오히려 저였습니다. 아이들의 양심이 작동되지 않는 이유는 몹쓸 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결핍을 채워주었다면 훔치지 않았을 것인데, 긍휼히 여기면서 품어주었다면 반사회적 병에 걸리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런가요. 사람들은 이 아이들을 도둑놈, 나쁜 놈들이라 부르며 낙인찍기 일쑤입니다. 자비와 관용을 베풀지 않는 이 세상,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앵벌이를 하고 삥을 뜯고 돈과 물건을 훔칩니다. 이 아이들의 아픔을 품겠다고 나선 저 또한 자비와 관용을 제대로 베풀지 못했습니다. 실패하고 또 실패한 나의 사랑, 참담하게 깨진 사랑을 부둥켜안고 가슴 치며 나의 못난 사랑을 참회합니다.
위기 청소년과 미혼모를 돕는 비영리 민간단체를 만들어 8년째 활동 중입니다. 경기도 부천에 소년희망공장과 소년희망센터를 만들었습니다. 이 정도 활동했으면 아이들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성공 사례를 쭉쭉 뽑아내야 하는데 늘어나는 것은 실패입니다. 머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가슴이 시키는 대로 일하니 실수투성이입니다. 종종 눕는 것은 약골인 체질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속이면 속아주고, 찌르면 찔려주고, 당하고 또 당하면서도 잘 참는 아내처럼 아이들을 품어주고 싶은데 저는 아무리 해도 잘되지 않습니다. 이 바닥 경력 20년이 넘는 공익 활동가 선배가 “이 바닥에서 성공은 실패하는 것”이라면서 “버티고 또 버티는 것”이라고 조언합니다. 고통의 세월로 빚은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품자!’라는 어설픈 기치 대신에 ‘못하면 못하는 대로 버티자!’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실패하고 또 실패할 나의 사랑을 위하여!
▲부천역 뒷골목에서 만난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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