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영 변호사 이야기

[희망의 한판승 14화] 2018-08-20


<위기청소년의 좋은친구 어게인>이 추진 중인 <소년희망센터> 건립을 응원하는 재심전문 박준영 변호사님에게 원고 청탁을 했습니다. 박 변호사님은 바쁜 와중에도 흔쾌하게 승낙했습니다.


억울한 위기청소년의 누명을 벗겨준 인권 변호사이자 위기청소년의 벗인 박준영 변호사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은 박준영 변호사님이 위기청소년에게 보내는 소년 희망 편지입니다. (창작자 주)


노화도 친구들과 함께. (오른쪽에서 두 번째, 선그라스를 낀 소년이 박준영 변호

사) ⓒ 박준영


때로는 한 장의 사진이

많은 사실을 말해줍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수학여행 가서 찍은 사진입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옆자리에 함께 한 친구들도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넷 중에 저만 도시 아이 같아 보입니다만, 사실 저는 전라남도 해남군 땅끝마을에서 배를 타고 30분가량 가야 하는 섬, 노화도에서 자랐고 그곳에서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고산 윤선도가 유배생활을 했던 '보길도'는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노화도는 보길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섬입니다.


부모님은 노화도에서

장사를 했습니다


저는 바쁜 엄마와 아버지를 도와 가게를 봤습니다. 목포에서 배가 들어오면 리어카를 끌고 선창가에 가서 물건을 받아 왔습니다. 부모님을 돕는 건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공부는 제게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시험이 닥쳐야 책상 앞에 붙어 앉아서 밀린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실컷 놀다가 엄마한테 잡혀 들어와 책상 앞에 앉으면 책이 눈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이미 눈에는 졸음이 한 가득입니다.


그러면 엄마가 안티푸라민 연고를 제 눈 아래에 쓱 발라버립니다. 화끈거려서 화들짝 눈이 떠지고 마지못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 엄마 덕분에, 그리고 썩 나쁘지 않았던 ‘공부 머리’ 덕분에 저의 성적은 최상위권이었습니다.


그런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박준영 변호사 엄마의 유서. ⓒ 박준영


어린 동생들

잘 보살펴 다오


"너희들 셋이 지금처럼 공부하고 말 잘 들으면 엄마가 없어도 도와주는 사람이 있단다. 엄마가 없다고 술 먹고 방탕한 생활을 하면 그것같이 불쌍하고 불행한 것 없다. 그 점을 언제나 머릿속에 염두 해라."


어린 너희를 놔두고 가는

내 마음을 헤아려다오

기가 막혀서 통곡을 한다


엄마의 유서입니다.


중학교 2학년이던 제게 초등학교 4학년인 동생들을 잘 보살펴달라고하셨습니다. 술 마시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엄마의 유언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부터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됐습니다. 술 드시고 집에 들어와 엄마를 자주 때렸던 아버지가 미웠고, 빚 독촉 전화가 수시로 걸려오는 집이 싫었습니다. 술과 담배를 일찍 시작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가출을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가 방황의 근거입니다.


1학년 때 선생님은 "순박하고 다정하나 뚜렷한 목표 의식이 요구됨이라고 쓰셨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학생이란 말이지요. 2학년 때는 "친구 간에 우애가 깊음"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뜻은 혼자 가출하지 않고 친구들을 데리고 가출하고, 잡으러 가보면 문제아들이 한데 뭉쳐 있었는데도 담임선생님이 '친구 간에 우애가 깊다'고 좋게 표현해 주셨습니다.


3학년이 되면서 더 난리가 났습니다. "근면 성실하나 준법성이 요구됨", '수우미양가'에서 '수' 받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가나다'에서 '다'를 받는 것입니다.


3년 동안 무단결석만 100일 가까이 했습니다. 지각과 조퇴는 물론이고 수업 땡땡이도 많이 쳤습니다. 생활기록부만 보면, 아무리 봐도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전형적인 비행청소년의 모습입니다.


헌법재판소에서 모범 국선대리인 표창장을 받은 박준영 변호사. ⓒ 헌법재판소


그랬던 아이가 헌법재판소

모범 국선대리인이 됐습니다


사진은 2016년 12월 표창장을 받을 때 모습니다. 오토바이를 훔쳐 타던 비행청소년이 25년 뒤, 타의 모범이 되는 법률가가 된 것입니다.


제 주변 사람들은 '인생 참 모를 일이다'며 이런 반전이 없다고들 하십니다. 긴 시간이 사람을 바꿨습니다. 아니 시간만 흐른 게 아닙니다. 지난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도움을 받았습니다.


1988년 10월 12일, 상복을 입은 중학교 2학년은 엄마 영정사진을 들고섬 마을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30년이 지났는데도 또렷이 기억나는 장면은 저희 형제를 가엾이 여기며 바라보던 섬마을 어른들의 눈빛입니다.


그 어른들은 제가 방황할 때도 '못된 놈, 나쁜 놈'으로 규정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엄마 잃은 어린 저희 형제를 걱정하시면서 보듬어줬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한 사회의 정체성을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까요?


높은 빌딩이 많고 소득이 높아야만 살기 좋은 사회라고 할 순 없습니다. 힘들게 살고 있는 이웃들, 의지 가지할 곳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그 사회가 어떻게 거두고 돌보는지가 좋은 사회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저의 첫 재심 사건은

'수원 노숙소녀

상해치사 사건'입니다

재심전문 박준영 변호사. ⓒ 오마이뉴스


2007년 5월 14일, 나이도 이름도 알 수 없는 여자아이가 고등학교 화단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가운데 노숙인 두 명과 가출청소년 다섯 명 등 총 일곱 명이 범인으로 몰린 사건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사건을 특별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수원역 주변에서 노숙하던 십대 가출청소년 다섯 명과 그리고 어른 노숙인 두 명 등 모두 일곱 명이 검사 앞에서 자기들이 죽였다고 자백한 사건이었으니까요.


하나같이 자기들이 죽였다는데, 한 명도 아니고 무려 일곱 명이 똑같이 죽였다고 하는데, 그걸 안 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쌤은 저희를 믿어주세요!


"근데요. 저희가 아무리 가출해서 훔치고 어쩌다 싸우고 그러지만, 양아치처럼 살았지만, 저희가 정말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쌤은 저희를 믿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노숙 소녀를 죽인 혐의를 받았던 가출청소년 중 한 명이 경기도 청소년상담복지센터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습니다. 선생님만은 제발 믿어달라는 내용입니다.


살인범으로 몰린 아이의 편지를 받은 센터 선생님들은 매일 저를 찾아왔습니다. 최선을 다해 변호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솔직히 귀찮았습니다


그런데도 자꾸 찾아오기에 선생님들께 숙제를 드렸습니다. 모두 일곱 명이 범인인 사건이어서 사건 기록이 엄청 두꺼웠거든요.


센터의 네 분 선생님께 각자 노트북 갖고 오셔서 아이들의 사건 기록을 분리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정리한 뒤에 다시 보자고 말했습니다.


범인으로 지목된 아이들은

하나 같이

불쌍한 아이들입니다


거리를 배회하다 뒷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는 위기청소년들. ⓒ 김진석


집이가난했습니다. 배움이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의지할 가족도 없었습니다. 거리를 떠돌다가 수원역사 내 벤치에서 쪽잠을 자며 살았습니다.


이러다 배고프면물건을 훔치는 등 나쁜 짓도했습니다.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친 아이들이었지만, 아이들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습니다.


이런 아이들이 살인범으로 몰렸습니다.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이 아이들의 편에 서서 경찰, 검찰, 법원을 상대하며 아이들을 믿어달라고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언론 보도를 보고 ‘사람을 죽인 아이들을 엄벌에 처하라’고 돌팔매질을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센터 선생님들은 돌을 맞을 각오를 하고 아이들을 구하려고 나선 것입니다.


물건을 훔치고 싸우며 사는 거리의 아이들이었지만 사람을 죽일 만큼 나쁜 아이들은 아니라고 믿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진심을 다해서 손을 내밀어주면 변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선생님들이 우리 사회에 있었습니다.


'수원 노숙소녀